<벌거벗은 한국사> 2회 연산군 1편에 이어 2편 입니다 :)
[벌거벗은 한국사] 2회 연산군 필기 및 총정리!! - 1편
지난 1편에서는 연산군의 성장배경과 함께
조선의 첫 사화인 무오사화까지 알아보았습니다.
2편에서는 폭력에 중독되어버린 연산군의 멈출줄 모르는 폭정과
두번째 사화인 갑자사화 그리고 연산군의 마지막인 중종반정까지 정리해보겠습니다✨
2회. 연산군은 왜 미치광이가 되었나?
목차 |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된 연산군
: 무오사화를 계기로 연산군은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강력해진 절대 권력을 철저히 개인적 욕망 실현에 남용하는 연산군
1. 금표비
- 금표비 : 연산군이 사냥터로 삼은 땅에 백성들의 통행을 금지시키기 위해 만든, 출입금지 푯말
- 금표비에 새겨진 문구
- ‘금표내범입자논기휘제서율처참 禁標內犯入者論棄毁制書律處斬’
- 뜻 ⇒ 금표 안으로 침범하는 자는 기훼제서율에 의거하여 처참한다
- 기훼제서율 : 임금이 정한 법률을 어기는 죄 및 그에 대한 처벌
📌 함께 읽어보면 좋을만한 기사
: 벌거벗은 한국사에는 없는 다른 측면의 디테일을 볼 수 있는 기사다.
기사에 따르면, 금표비 관련 내용은 ’연산군일기’에 나온다고 한다. 연산군일기가 워낙 과장과 왜곡이 많았고
관련 증거가 딱히 없었는데, 1994년 고양시 대자동에서 금표비가 발견되며 사실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 금표비는 연산군 말기에 도성 밖 100리 (반경 40km)까지 세워지게 된다
- 한강 북쪽으로는 파주, 양주, 포천, 한강 남쪽으로는 김포에서 경기도, 광주까지!
- → 연산군의 부동산에 대한 탐욕 !!
2. 사치와 향락
- 무오사화 이후 재위 5년부터 나라가 거둔 세금보다 지출이 더 많아짐
- 무오사화 이후 위축된 신하들이었지만 연산군의 사치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음 → 결국 연산군에게 반발하기 시작!
연산군 재위 8년, 삼정승을 주도로 연산군 의견에 반대함 → 시폐10조
- 삼정승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 시폐10조 : 연산군이 저지른 폐단과 실정을 10가지 항목으로 기술
- 시폐 時弊 : 그 시대의 잘못된 폐단
⇒ 연산군은 심기를 건드린 삼사와 대신들 모두 무자비하게 처벌한다.
갑자사화 (1504)
: 1504년 3월 19일.
무오사화 6년 후, 두 번째 사화의 발생으로 피바람이 시작된다.
갑자사화의 발단
임사홍과 임숭재
- 1504년 3월 19일 밤.
평소처럼 임숭재 집에서 임사홍과 임숭재와 함께 술을 마시던 연산군 - 임사홍의 얼굴이 계속 어두워져 연산군이 이유를 물으니,
임사홍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연산군 생모 폐비윤씨의 죽음의 전모를 밝히기 시작함 →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임사홍은 성종의 후궁 엄씨와 정씨가 폐비 윤씨를 중상모략하여 그 계략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 이야기를 듣고 바로 궁궐로 향한 연산군!
왕이, 모비 윤씨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와 정씨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시와 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주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연산군일기>
- 엄씨와 정씨의 아들 → 항과 봉
- 이후 연산군은 항과 봉을 끌고 연산군의 할머니 인수대비의 처소로 난입
- 실록에 기록은 없지만 야사에는 인수대비가 이후에 이 사건으로 인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연산군은 엄씨와 정씨를 처형하고 시신을 소금에 절여 젓갈로 담그고 그뿐만 아니라 산과 들에 시신을 유기한다…!
연산군은 왜 항과 봉을 불렀을까?
- 연산군의 분노 포인트 → 가족이 가족을 죽인 것
- 잠재되어 있던 왜곡된 복수심 표출
연산군은 이미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 드라마에선 보통 피 묻은 적삼을 통해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것으로 묘사
- →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
- 임사홍과 임숭재와 함께 술을 마시던 날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폐비 윤씨에 대해 알고 있었다라는 주장 + 기록
- 연산군 즉위 1년 스무 살 때
- 아버지 성종의 묘지문을 뵤게 된 연산군
- 생전 처음 본 외할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왕이 성종의 묘지문을 보고
'윤기견이란 이는 누구냐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하며 묻자
'윤기견은 폐비 윤씨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 이때 처음으로 생모 윤씨가 죄를 받아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연산군
- 큰 충격에 빠진 연산군을 담은 기록
왕이 비로소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죽은 것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 갑자사화가 발생한 그날 임사홍을 통해 이 사실을 안 것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그 생모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것!!
⇒ 연산군의 마음 한 켠 오랫동안 쌓인 마음 속 비통함
- 다만, 윤씨가 폐위되어 죽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내막은 몰랐던 것으로 추측
- 이후 갑자사화 때 이르러 쌓아왔던 분노가 표출됐을 것
절정에 이른 폭정, 갑자사화
- 약 7개월에 걸쳐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이들을 숙청 ⇒ 피의 복수극!!
- 폐비 윤씨의 죽음에 찬성했거나 동조했거나 묵인한 자들을 모두 벌함
-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빼앗기고, 유배를 가고, 사형을 당함 → 피해자 약 200여 명
- → 점점 미치광이가 되어가는 연산군
- 이때 신하들을 향한 연산군의 무시무시한 선전 포고 :
"위를 능멸하는 풍속을 이루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다.
위를 능멸하는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경중을 논할 것 없이 죄주어 경계할 줄을 알게 해야겠다."
<연산군일기>
⇒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 처벌하겠다는 의미
극악무도 공포정치의 서막
-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방법으로 잔악한 형벌을 가하는 연산군
- 쇄골표풍 碎骨漂風 (부술 쇄 / 뼈 골 / 떠다닐 표 / 바람 풍)
- 죽은 자의 묘비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쳐서 가루로 만든 다음 해골 가루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는 뜻
- 조상을 잘 섬기는 것을 핵심 가치로 여겼던 조선이었기에, 당시 가치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형벌!
- 죽은 자의 묘비를 부수고 유골을 파헤쳐서 가루로 만든 다음 해골 가루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는 뜻
- 권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공포정치를 택한 연산군
- → 이때 공포정치의 효율성을 맛보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
술과 여자에 빠진 연산군
유흥과 주색의 끝
- 연산군은 국정은 내팽겨쳐두고 끊임없이 연회를 열었다.
-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정원 등 궁궐을 비롯하여 서울의 주요 명승지를 사치와 유흥의 장으로 전락시킨다.
- → 왕의 권위를 중시하던 연산군 스스로 왕실의 권위를 바닥으로 떨어트림…!!
연산군의 유별난 기생 사랑
운평과 흥청
: 흥청 > 가흥청 > 운평
- 운평 運平 (옮길 운 / 평평할 평)
- 연산군 때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둔 가무 기생 (1504년)
- 태평한 운수를 만났다는 의미 (運際太平)
- 흥청 興淸 (일 홍 / 맑을 청)
- 그중 대궐로 뽑혀 온 최고의 운평을 이르는 말
- 사악한 더러움을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 (蕩滌邪穢)
- 흥청망청 興淸亡淸
- 오늘날 의미 = 돈이나 물건을 마구 사용하거나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것
- 당시 의미 = 흥청들과 함께 놀다가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의미
궁궐에서 연산군과 함께 생활한 흥청
- 연산군은 흥청들에게 수시로 재물과 노비를 내리고
심지어 흥청의 부모들을 한양으로 불러 집과 땅을 하사한다.- 연산군 10년, 운평과 흥청의 수 1,000여 명!
- 이후 10,000여 명까지 증가!!
- 채홍사 採紅使 (캐다 채 / 붉을 홍)
임숭재가 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1505), 연산군에게 남긴 유언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전하께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만이 한이다"
- 임숭재는 이미 시집간 여동생까지 연산군에게 바쳐 침소에 들게 했다.
- 중종반정 이후 부관참시 되었다.
폭군 연산군의 초라한 최후
: 영원할 줄 알았던 권력의 마지막
중종반정 (1506년)
: 연산 12년 9월 1일 저녁 (음력)
- 마침내 신하들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실행한다.
- 미치광이 왕 연산을 몰아내고 제대로 된 새로운 임금을 세우는 조선 최초의 반정!
'거사하기 하루 전날
마사와 건장한 장수들이 호응하여 운집하였고
군민 등이 소문을 듣고 분주히 나와 거리와 길을 메웠다'
<중종실록>
- 반정을 주도한 신하와 군대를 도와준 조력자
- 유자광 !!!!!
- 유자광은 한때 연산군의 최측근이자 무오사화를 일으킨 장본인!
- 간신들에게 마저도 배신당하는 연산군의 씁쓸한 마지막…!
- 유자광 !!!!!
- 연산군을 폐위시키기 위해 궁에 찾아온 반정군에 의해 연산군은 왕위를 내려놓게 된다.
- 옥새를 확보한 반정 세력은 중종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 반정이 성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았다.
➕ 연산군 스스로 폭군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도, 크게 놀라고 당황했지만
”내 죄가 중하여 이리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여라.”라며
순순히 옥새를 반정 세력에게 주었다고 한다.
→ 흔히 사극에서는 왕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 때
현실을 부정하며 발광을 하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연산군은 완전히 달랐던 것!
— 출처 : 나무위키
연산군의 마지막
- 폐위된 연산군 → 강화군 교동도에서 유배 생활
- 약 2개월 만에 전염병으로 사망 (중종 1년 11월, 1506년 11월)
- 이때 연산군의 나이 31세
서울 시내에 위치한 연산군의 묘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 왕의 묘는 보통 '릉'이라 부르지만, 연산군은 대군이기에 '묘'로 불렸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독선적인 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연산군
→ 반면교사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역사의 기록!
- 반면교사 反面敎師 (돌이킬 반 / 낯 면 / 가르칠 교 / 스승 사)
- 사람이나 사물 따위의 부정적인 면에서 얻는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주는 대상
- 따르거나 되풀이해서는 안 될 나쁜 본보기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연산군은
끝끝내 폭력의 어두움 속으로 빨려들어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벌거벗은 한국사> 2회 연산군 편의 주제가
"연산군은 왜 미치광이가 되었나?" 였기에
여기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직 많은 세월을 살아 인생의 모든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사건/사고가 발생했을때 그 원인은 온전히 단 하나에 있지 않으며,
누군가 잘못을 저질렀다 할때도 그 누군가가 모든 악의 원인이며 원천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연산군의 어린시절 얘기를 보았을 때,
질투심 많고 예민한 아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고.
마른 땅에서 혼자 피어나는 미치광이가 없듯이
연산군 주변에서 끊임 없의 그의 악함을 자라게 하는 여러 상황과 인물들이
연산군이라는 시대의 폭군이 폭주하는 무대를 닦아 주게 된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요즘 시대에도 많은 범죄자들이나 미치광이들이 있다보니
연산군이 왜 저렇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과 만약에 다른 상황이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하는 의문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멤돌았습니다.
정말 이 연산군 케이스를 반면교사 삼아서
또 다른 미치광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악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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